<그래도, 낭만 >을 기획하며…….
기획 글. 예술감독 강효연
대구현대미술제의 정신과 2024년도 전시의 방향
1974년 최초로 대구현대미술제가 개최되고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작가들의 자발적인 연대로 만들어진 대구현대미술제는 작가들 간의 공감과 집단적 동기가 발현된 결과물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실현하고자 한 예술 활동이었다. 특히 작가들은 새로운 예술을 갈구하듯,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들을 발표하며 시대의 정신을 이끌었다. 이러한 집단적 움직임은 하나의 일관된 양식을 일궈내는 것이 아닌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며 1970년대에 일어난 또 다른 흐름이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 1960년 4.19가 독재에 저항한 목소리가 있었다면,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1970년대는 표현의 갈망이 컸던 시기로, 작가들은 형식을 타파하는 설치와 오브제, 행위 등의 실험이 강조된 전위미술을 선보였다. 1974년 70여 명이 참여한 제1회 대구현대미술제가 계명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릴 때, 그들은 ‘폐쇄적인 데서 개방적인’ 것으로, ‘침체보다 흐름’의 방향을 설정하였고, 1977년 3회 때부터는 낙동강 강정 백사장에서 ‘이벤트’란 이름으로 행위예술이 펼쳐졌다. 1978년경에는 지방마다 현대미술제가 열리고, 비슷한 형태와 내용 그리고 비슷한 작가들이 참여하는 전시란 지적과 비판이 이어지면서 1979년 제5회 현대미술제에는 일본의 젊은 작가 15명과 한국작가 50명이 참가하는 전시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이때를 계기로 1980년대에는 일본과의 교류 전시가 종종 열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지금, 대구현대미술제는 지역 주민들의 일상과 예술이 만나고, 다양한 예술의 변화와 흐름을 접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 과거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대를 잇고, 현재를 이야기하며 미래를 지향하는 모두에게 다양한 형태의 미술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과 마음에 스며드는지 말하는 자리로 말이다.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충분치 못했던 70년대와 달리, 여전히 이념적 혹은 정치적 각을 세우는 예도 있지만, 지금의 현대미술은 실험이란 말이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미술이 만들어지고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할 때 2024 대구현대미술제가 나아갈 방향은 무엇일까? 그건, 그 시대의 현상과 비판 그리고 바람이 담긴 내용을 전시로 노출하는 것이 아닐까! 세계의 손꼽히는 미술제나 비엔날레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과 이념의 상처로 얼룩진 과거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예술을 통해 세상을 향한 굵직한 목소리이길 바라면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구현대미술제의 정신을 계승하고 세대를 아우르며 예술의 다양성이 공존하고 공유되어야 한다는 취지 아래, 명확한 전시의 주제가 도출되고 공감의 장이 형성되길 바란다. 이번 전시에는 제1회 대구현대미술제를 이끌었던 김영진 작가와 70년대 미국으로 이주해 본격적으로 실험 미술을 실천한 곽훈 작가를 포함해 총 40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본 전시 출품작가 29명, 달천예술창작공간 4기 입주작가 6명 그리고 달성문화도시센터에서 진행한 청년작가 전시 공모전 선정작가 5명의 작품으로 강정보 디아크 실내외 공간에 설치되었다.
전시주제
이번 전시의 주제로 ‘생과 사’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 관해 논해보고자 했다. 참으로 무거운 주제지만 누구에게나 해당하고, 이를 통해 겸허해질 기회가 아닐까 싶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란 뜻으로, 다시 말해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그러므로 오늘을 기억하라’로 해석할 수 있다. 전 세계를 뒤엎은 코로나란 전염병은 인간의 이기심을 확인하게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고, 인간 존중의 의미는 국적을 초월해 남녀노소, 인종 차별 없이 보편적인 인류애로 비쳤건만…. ‘평화’, ‘평등’, ‘배려’는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교과서적인 문구일 뿐, 지금의 세상에서 공존하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인생은 뫼비우스의 띠를 걷듯 터무니없는 욕심과 실수로 반복되는 듯하다.
네덜란드의 화학자 파울 크뤼첸이 2000년 처음 제안한 인류세(人類世)는 새로운 지질시대 개념으로 오늘날의 환경 문제로 부각되어 종말의 가설을 가속하고 있다. 척박한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개인의 내면을 존중하는 시대에도, 혹은 좌절과 불안함 속에서도 낭만을 실천하는 예술가들의 도전은 이루어졌다. 이번 전시를 통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꿈의 세계를 공유하고자 한다. 1974년 대구 현대미술제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도 이러한 예술가들의 태도와 실천이 이루어낸 낭만의 결과일 것이다.
인간의 생은 영원하지 않기에 절대성을 갈구하고 삶 속에 끌어들인다. 이번 전시는 인간사 너머에 영원함이 있을 거라고 믿는 종교적인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생성과 소멸의 이치를 알고 있으면서도 불멸과 영원을 갈망하는 욕망과 바람의 형태들을 드러내고자 했다. 시간을 거스를 수 없기에 순간의 아름다움을 현재에 가두고 박제하려는 인간의 도전은 예나 지금이나 예술작품으로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이에 전시의 키워드가 될 ‘낭만’은 불멸과 영원이란 불가능한 지점을 설정하고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 태도의 표현이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들의 이야기로 펼쳐보고자 했다.
네덜란드의 화학자 파울 크뤼첸이 2000년 처음 제안한 인류세(人類世)는 새로운 지질시대 개념으로 오늘날의 환경 문제로 부각되어 종말의 가설을 가속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에게 내재한 두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기술 문명이 이룩한 성과 이면에는 항상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AI 기술은 현재 과학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이지만, 무분별한 수용과 그에 따른 우려도 뒤따르면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예술은 집착의 결과물이다. 인간의 두려움은 사회 전반적인 현상과 묘하게 맞물려서 표출되는데, 이는 인간의 바람과 믿음, 또는 꿈이 되기도 하고, 종교, 신화, 샤먼 등을 작품의 주제 또는 소재로 하여 인간 내면의 상태를 살필 수 있는 다채로운 작품들이 만들어진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을 크게 4가지 맥락에서 분류, 접근했다. 첫 번째로 인간의 욕망과 실천, 두 번째로는 종교 혹은 샤머니즘적 현상, 세 번째는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 네 번째는 사회적 현상과 인생에 관한 목소리를 담고 있다.
구역별 작품 구성 : 실외
1.
첫 번째 군에 속하는 곽훈의 <포크레인 드로잉> 퍼포먼스는 인간의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땅을 팔 때 사용하는 포크레인 머리에 큰 붓을 묶고, 작가가 기계를 조작해서 큰 캔버스 천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문명과 마주하는 작가만의 저항의식이 낭만적으로 펼쳐진다. 결과보다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한 뒤샹의 다다이즘처럼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함으로써 새로운 관념을 창조한다고 하겠다. 이어 권용주의 <폭포 2024>는 건축현장 한쪽에 쌓여 있을 법한 포장 천막이나 물건들을 이용해 언덕 모양으로 구성한 인공폭포이다. 조리되지 않고 날것으로 드러내는 반항적인 형태는 미의 기준에 맞서기도 하지만 당대의 부조리나 현상을 까발리듯 적나라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천막을 뚫고 내뿜는 물줄기는 거칠면서 시원하다. 야외 전시공간 초입에 있었던 권효정의 <삶의 분수 : 강정>은 주변 사람들이 쓰고 버린 물건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작품을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체험한 다양한 사물의 등장으로 친숙하면서도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물은 본래 기능과 장소에서의 쓰임이 있는데, 사물 본래의 기능을 잃고 새롭게 분수의 형태로 환생한 듯하여, 사람들은 사물의 부활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늘을 향해 내뿜는 분수의 물줄기를 통해 그 생명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디아크 언덕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위 2개는 이태수의 작품으로 초현실적인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진다. 상식적으로 쉽게 들어 올릴 수 없는 바위를 가느다란 선 위에 띄우는 것으로 우리는 인식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아무렴 그것이 속임수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작가의 의지, 불가능해 보이지만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도전의식을 느낄 수 있다. 다음으로 이시영의 <날고 싶은 꿈>은 새를 닮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쉽게 이룰 수 없는 인간의 고뇌를 느끼게 한다. 언덕에 올라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응시하는 신화 속의 이카로스처럼 자유를 원하는 인간의 꿈을 떠올리게 한다. 강호 작가는 버려진 나뭇가지들을 모아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해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다. 사람을 닮은 나무들은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며 디아크 언덕 위를 거닌다. 이러한 연출은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나무 정령들이 디아크 광장을 찾은 이들을 언덕으로 좀 더 나아가 하늘로 이끄는 모습이다. 원시 종교를 떠올리듯 사물에 깃든 넋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어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듯하다. 정지연의 작품 <생명의 나무 2024> 또한 버려진 나뭇가지를 모아 만든 작품이다. 나무라는 유기체와 산업 쓰레기인 스테인리스를 결합해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는 큐브 모양의 하얀 나무를 만들었다.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 환경과 기술이라는 떼어낼 수 없는 관계의 의미를 떠올리며 협력을 통한 영원을 향한 가능성을 제안한다. 디아크 야외 광장에서 건물로 향하는 곳에 덩그러니 놓인 검은 색의 삼각기둥의 구조물이 있다. 김병호 작가의 <세 개의 레이어>는 기하학적 형태의 구조물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내부에 부착된 거울로 인해 다각형의 공간이 만들어지는 특징이 있다. 또한, 하늘의 풍경이 구조물 내부로 반사해 실내 풍경은 한마디로 복잡해지는데, 이렇게 복제된 세상이 360도 형성되면서 내부에 있게 되면 비현실적인 공간에 갇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은 야외에서 실내로 진입하면서 갑작스럽게 현실을 이탈하기에 생기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새들의 등장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더욱 혼란스럽게 느껴져 현실과 초현실의 틈을 극대화한다.
2.
두 번째로 오늘날 지구의 환경 문제를 염려하는 작가 허산은 공들여 이룩해 놓은 우리 환경을 더는 무너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든탑>을 제작했다. 석탑 사이에 있는 푸른 구슬은 파란 지구를 연상시킨다. 탑의 몸체에 위치하는 탑신부에는 보통 부처나 이름 높은 스님의 사리를 보관하는데 바로 그곳에 귀한 의미를 담고 지구를 닮은 구가 놓인 것이다.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을 거라 믿으며, 우리의 지구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진기종의 <일념의 시간>은 합장하고 공중에 떠 있는 커다란 손의 경건한 기도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과거부터 이어져 온 수많은 종교 분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이들은 종교를 통해 소망하고 뜻을 이루기를 바란다. 작품은 특정 종교의 염주나 묵주가 아닌, 기도 시 사용하는 성물의 비드 개수의 평균값(카톨릭 59개, 이슬람 99개, 불교108개)인 88개의 비드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하늘을 배경으로 엄숙한 순간의 고요함을 만들어내는 <일념의 시간>은 인류가 소망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우리의 기도에 관해 묻는 듯하다. 진귀원의
3.
‘누구나 가야 할 길’을 조용히 걷는 사람들을 묘사한 김영진의 작품은 로댕의 <칼레의 시민>을 연상시킨다. 죽음에 순응하는 자세로 자루를 뒤집어쓰고 모두 한 방향을 향하는 사람들은 수도자와도 같이 그들의 행로를 알고 있다. 로댕이 칼레 시의 자랑스러운 영웅들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작가는 삶의 유한함을 알듯 겸허하게 자신의 길이자 인간의 길을 표현했다. 인생을 찰나, 순간으로 풀어내는 임현락의 <붓길, 백(白)으로 날아오르다>란 작품은 사람이 흙에서 나고 흔적을 남기며 바람이 되어 날아오르듯 승천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시작과 끝, 그 사이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을 이야기한다. 김희선의 <비가_북33.35°동126.50°>는 고사(枯死)한 구상나무들이 촬영된 위치의 좌표를 뜻한다. 기후변화 및 환경적 요인으로 고사(枯死)되어가는 구상나무에 대한 상여를 마련한 작가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고발하듯, 고사된 나뭇가지로 만든 큰북의 행렬은 자연의 울림을 애도한다.
4.
이진준의 <해피 뉴 이어>는 게임 엔진을 이용해 가상의 풍경을 연출한 영상 작품이다. 2023년 12월 31일부터 2024년 1월 1일 사이의 시간적 배경 아래 새해를 맞이하는 각국의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전쟁과 재난, 기후 위기로 고통받는 전 지구적 상황을 흥미롭게 드러낸 작품이다. 영상은 책가도를 보듯 국가별로 분리된 이야기들이 전체적으로 합쳐지면서 자유의 여신상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과도 같은 자유의 여신상 앞으로 보이는 상황들은 지구촌의 풍경이 되어 보통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향에 대해 반문하는 듯하다. 권오상은 조각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작가이다. 이번 작품은 인생사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사물의 이미지이면서 형상을 얼기설기 맞물린 조각으로 드러낸다. 조각 사이사이 등장하는 사물과의 관계는 한편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삶의 풍경이자 파편화된 이미지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성태향의 <먹이제공터>란 작품은 오늘날 사회구조의 일면을 드러낸 것으로 굶주린 독수리에게 먹지 못하는 먹이를 제공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유익한 것이 아닌데 우리를 유혹하는 대중매체나 소비 현상과 같은 당혹스러운 상황을 꼬집으며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게 한다. 과학을 통해 인간의 욕구나 욕망을 실현하는 시대에 사는 현대인에게 리우 작가는 컴퓨터 부품으로 테크놀로지 시대의 여신을 만들어 소개한다. 현대적이면서 고전적인 형태의 조각상은 이 시대의 현상을 반영한 우상의 이미지일 것이다. 작가는 테크놀러지를 입고, 신을 꿈꾸는 인간이 이루려는 환영의 세계를 노골적으로 신격화시켜 현대인이 꿈꾸는 기술 이면의 세상에 관해 묻는다.
언덕 위 디아크 건물 입구 쪽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얼기설기 엮여 있는 작품 <1/4를 결합하는 방식>은 정혜련 작가의 것이다. 낮에는 강한 햇빛으로 하얀 띠로 보이지만, 점차 해가 기우는 시간부터 작품은 아름다운 빛깔을 만들어낸다. 실외에서 실내로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는 이 작품은 일률적인 크기와 모양의 모듈이 연결되어 긴 곡선의 형태가 만들어지고, 이 긴 곡선이 공간에 빛 드로잉으로 완성되는 작품이다. 긴 곡선은 중력 궤도같이 우리를 머물고 나아가게 하는 길처럼 보인다.
구역별 작품 구성 : 실내
디아크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은 크게 하얀 방과 붉은 방으로 분류해 소개하고자 했다. 디아크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 홍보관 쪽으로 알록달록한 붉은색 작품들이 많은데, 내용상으로는 신화와 샤머니즘적 세계를 보여준다. 이어서 디아크 중앙 홀인 하얀 방에는 무채색의 작품들을 통해 사후의 세계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야외 공간에서는 인간의 바람과 욕망 등 세상사를 제시했다면, 실내 공간에서는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살피고자 했다. 그래서 사후에는 이럴 것이라는 좀 더 상상력이 반영된 꿈의 세계로 펼쳐진다.
1.
이재호는 그리스 신화 속 페르세포네를 몬스터화하여 지상과 지하를 오가는 모습을 그렸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는 어머니와 같이 대지와 곡물을 상징한다. 작가는 페르세포네의 지하로의 납치와 지상으로의 귀환을 대지의 풍요와 척박, 성장과 소멸 등 계절의 순환을 의미하며, 생명과 죽음의 순환 관계를 나타낸다. 작가는 이렇듯 신화를 통해 인간사의 이치를 받아들인다. 우정수의 작품은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가운데 그려진 것이다. 작품은 작가 본인의 이야기이면서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자신의 페르소나인 미스터 페인터를 그림 속에 등장시켜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인간의 욕망과 좌절, 승리와 실패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겪는 두려움과 불안한 감정을 담아낸다. 화면 속에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와 장면들이 파편적으로 등장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동시대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냉소적으로 풍자해 극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민화와 십장생으로 불로장생의 소망을 표현해왔다. 배문경은 이번 전시에 <이상한 나라의 민화 이야기_WISH>란 영상설치작품을 소개한다. 영상에 등장하는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은 오래도록 살고, 죽지 않는 열 가지로 영원불멸을 기원한 것이다. 민화, 십장생의 이미지를 입체로 구현하고, 미디어와 접목하여 공간에 맞게 입체적으로 매핑해 다양한 전통적인 우리네 꿈의 풍경을 소개하였다. 오제성의 <염원의 항아리>는 초벌 소성 과정에서 하자가 생겨 폐기 직전의 항아리를 수거하여 화장토로 그림을 그려 넣는 연작이다. 버려질 위기의 항아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된다. 작가는 꿈과 이상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철학적이거나 재치 있는 글귀를 쓰고, 대중문화에서 보이는 아이콘을 등장시킨다. 이렇듯 작가는 의도치 않게 생긴 상처를 치유하듯, ‘염원의 항아리’를 통해 각각의 역할을 위임하고, 복을 기원한다.
2.
디아크의 중앙이자 원형 공간에 들어서면 7m 높이의 대형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이재훈의 <피고 지고, 피고 지고...>란 작품으로 로렌죠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을 오마주한 작품이다. 르네상스 조각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 일컫는 이 “천국의 문”은 구약성경을 10개의 패널로 압축해 “아담과 이브”, “다윗”, “야곱과 데사우” 등의 이야기를 담고, 아주 정교한 금박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이재훈은 동양의 회화 방식으로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동양적 세계관을 표현했다. 고정된 실체가 없이 변화를 그린다는 것은 움직이는 현상을 그리는 것과도 같다. 이것은 어찌 보면 감각에 의존하는 것이기도 하다. 천국의 문에 새겨진 세계의 무한함 속에 인간의 번뇌를 마주하는 듯하지만, 이 또한 끝이 있고, 번뇌를 극복해 다시 피어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병호의 <인체측정>은 인체 조각의 조각적 ‘완결성’을 극복하려는 과정의 작품이다. 기본의 단일 형태와 덩어리를 미리 설정하고 그것의 윤곽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무한하게 변형, 확장하고 있다. 완성에서 시작되는 작업방식은 완성이 빠진 채 진행되는데, 작가는 본 작업으로 인한 예측 불가능한 진행형의 조각과 그 가능성을 찾아보기 위함이다. 단일한 순간에 머무는 조각의 형태가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조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작품에서 인간의 외형이 아닌 내면의 세계로 향하는데, <인체측정>의 인체 조각을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의 유한함을 극복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느끼게 한다.
양수연의 작품
전가빈은 어린 시절에 접한 슈퍼 영웅들이 세월이 흘러 어떠한 이미지로 다가오는지 재현한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정직하고 정의로우며 이타심을 가진 멋진 영웅이다. 그러나 이 영웅들이 관념의 허상과도 같이 현실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문명이 만들어낸 허상들, 한때 아름다웠으나 이제는 시멘트로 박제된 우리의 영웅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작가는 인간이 기억해야 할 가치를 되묻듯, 아톰에게는 금빛 심장을, 어린이가 기억해야 할 피노키오의 코에는 금색의 긴 코를 선사한다. 문관우는 2022년부터 현재까지 매일 한 점 이상씩 흙을 빚어 백자를 만들고 있다. 계획을 세우거나 구체적인 형태를 구성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나 매일 일기를 쓰듯 손으로 빚은 ‘조각 일기’가 되었다. 어느새 작품 <백색 오브제들의 O형적 집합>은 조각가에게 매일 형태를 연구하는 수련의 과정이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하나가 모여 다수를 이루는 집합의 힘으로 다가온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몫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박제된 영웅들’, ‘공든 탑’, ‘염원의 항아리’, ‘일념의 시간’ 등의 상황을 마주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몫은 우리가 경험하고 만들어가는 인생에서 생겨난 이야기의 본질을 기억하고, 꽃이 피는 순간을 기억하며, 우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척박한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개인의 내면을 존중하는 시대에도, 혹은 좌절과 불안함 속에서도 낭만을 실천하는 예술가들의 도전은 이루어졌다. 이번 전시를 통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꿈의 세계를 공유하고자 했다. 1974년 대구 현대미술제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러한 예술가들의 태도와 실천이 이루어낸 낭만의 결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