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난장난장(Clash, Crash, Create)>을 기획하며…….
기획 글. 예술감독 강효연
대구현대미술제의 정신과 2025년도 전시의 방향
1974년 최초로 대구현대미술제가 개최하고 51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작가들의 자발적인 연대로 만들어진 대구현대미술제는 작가들 간의 공감과 집단적 동기가 발현된 결과물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실현하고자 한 예술 활동이었다. 특히 작가들은 새로운 예술을 갈구하듯,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들을 발표하며 시대의 정신을 이끌었다. 이러한 집단적 움직임은 하나의 일관된 양식을 일궈내는 것이 아닌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며 1970년대에 일어난 또 다른 흐름이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 1960년 4.19가 독재에 저항한 목소리가 있었다면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1970년대는 표현의 갈망이 컸던 시기였다. 당시 작가들은 형식을 타파하는 설치와 오브제, 행위를 통해 실험이 강조된 전위미술을 선보인 것이다. 1974년 70여 명이 참여한 제1회 대구현대미술제가 계명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릴 때, 그들은 ‘폐쇄적인 데서 개방적인’ 것으로, ‘침체보다 흐름’의 방향을 설정하였고, 1977년 3회 때부터는 부대행사로 낙동강 강정 백사장에서 ‘이벤트’란 이름으로 행위예술이 펼쳐졌다. 1978년경에는 지방마다 현대미술제가 열리고, 비슷한 형태와 내용 그리고 비슷한 작가들이 참여하는 전시라는 지적과 비판이 이어지면서 1979년 제5회 대구현대미술제에는 일본의 젊은 작가 15명과 한국작가 50명이 참가하는 전시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이때를 계기로 1980년대에는 일본과의 교류 전시가 종종 열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지금, 달성 대구현대미술제는 지역 주민들의 일상과 예술이 만나고, 다양한 예술의 변화와 흐름을 접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 과거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대를 잇고, 현재를 이야기하며 미래를 지향하는 모두에게 다양한 형태의 미술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과 마음에 스며드는지 말하는 자리로 말이다.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충분치 못했던 70년대와 달리, 지금의 현대미술은 실험이란 말이 새롭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미술로 만들어지고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작년 달성 대구현대미술제 전시는 <그래도, 낭만>이란 제목으로 예술의 가치와 의미에 관해 묻고, ‘생과 사’란 키워드로 인간에게 예술은 무엇인지 고민하며, 인간의 바람과 염원을 담아서 제작된 작품들이 다수 소개되었다. 한마디로 인간이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예술에 이르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하는 행위와 의미에 대해 탐구하고자 했다.
반면, 2025년도 달성 대구현대미술제가 나아갈 방향은 이 시대의 현상과 비판 그리고 바람이 담긴 내용을 전시로 노출하고자 한다. 세계의 손꼽히는 미술 전시회나 비엔날레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과 이념의 상처로 얼룩진 과거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예술을 통해 세상을 향한 굵직한 목소리이길 바라면서 이번 전시를 마주하고자 한다. 바로 대구현대미술제의 정신을 계승하고 세대를 아우르며 예술의 다양성이 공존하고 공유되어야 한다는 취지 아래, 명확한 전시주제가 도출되고, ‘의미의 구현’을 통해 공감의 장이 형성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올해로 제14회를 맞이하는 ‘달성 대구현대미술제’는 본전시와 달천예술창작공간 제5기 입주작가 특별전, 달천예술창작공간 역대 입주작가 교류전으로 구성된다. 강정보 디아크 광장에서 펼쳐지는 본전시에는 구지은, 김성수, 김영섭, 류재하, 박기진, 서동신, 신민, 심승욱, 왕지원, 원선금, 임승천, 정득용, 정승, 정재범, 홍범, 홍준호, Studio 1750(김영현, 손진희) 총 17팀(18명)의 작가가 참여하고, 조각, 설치, 사진 등 총 21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전시주제
이번 현대미술제는 다다이스트들이 벌인 ‘난장’의 기치를 떠올리며, 지금의 현상들(환경문제, 자국 우선주의, 종말론 등 다양한 사회 문제들)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극복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통해 소통의 장, 놀이의 장으로 펼쳐보고자 기획되었다.
"다다이스트(영어: dadaist)"는 "다다이즘"이라는 예술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 기존 질서와 가치에 대한 반항으로 등장한 예술 운동으로, 비합리성과 무의미함을 강조하며 반예술적인 경향을 보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혐오하고, 전쟁을 부추긴 민족주의와 식민주의, 부르주아적 이해관계를 증오한 다다이스트들은 밤마다 ‘카바레 볼테르’에 모여 도발적인 퍼포먼스로 부르주아 문화와 전통에 조롱과 경멸을 보냈다. 다다이즘의 창시자 후고 발(Hugo Ball, 1886 ~ 1927 )이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의 공연에서 보여준 것은 시 낭송, 산문 낭독, 합창, 클래식 연주, 즉흥 연주와 즉흥적 극 등으로 구성된 종합예술의 ‘난장’이었다. 이러한 실험적인 태도와 시도는 이후 현대미술이란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서구 현대미술(Modern Art)의 시작과 1974년 실험정신을 내세운 대구현대미술제의 출발을 다시금 떠올리며,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 보고자했다. 진실을 담고자 했던 사실주의 미술의 출발은 바로 현대미술의 시작이었고, 종교, 신화, 왕을 숭상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탄생했다. 또한, 작가의 개성과 철학이 반영된 것으로 현대미술의 존재가치는 자리매김하였다. 더불어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요구받기도 하는데 이는 예술을 통해 대중과 함께 소통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바람이 담긴 것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사색의 장을 제공하게 한다.
인류의 시작은 바로 카오스, 지구가 생겨나기 이전의 원초적인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지금을 환기하고자 한다. 현실의 허무함, 암담함, 절망, 무모함, 두려움을 뒤로하고, 다시금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전시 ‘난장’은 숙고의 장이자 소통하고픈 대화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어려운 상황을 재치 있게 표현하는 예술가들의 예술적 수다를 강정보 디아크에서 유쾌하면서도 의미 있게 마주하길 바란다.
참여작가
전시에 참여한 작가 중 상당수가 사회현상에 관해 언급했다. 특히 환경문제를 통한 각성의 메시지는 인간이 이룩한 세상에 대한 숙고의 이미지가 반영되어 있다. 원선금의 <재생된 권위_2025>는 약 1,300장의 과자봉지를 엮은 ‘재생의 카펫’으로 형상화된다. 하늘 높이 향하는 봉지 카펫은 현대인들의 소비 형태를 극대화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인간의 욕망과 지금의 소비 현상을 반영한다. 먹고 쉽게 버려지는 과자봉지를 보며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그 지점을 극대화한 원선금의 <재생된 권위_2025>는 인간의 이기주의가 만들어 낸 허상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한다.
구지은의 <뉴제비타운>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풍경을 환기하게 한다. 높은 빌딩과 아파트의 등장으로 생태계는 큰 변화를 겪어야 했다. 한옥 처마에 둥지를 틀던 제비들은 이제 보호종이 되어 터전을 잃어 이들의 이동 경로를 찾기도 쉽지 않다. 제비의 이동 경로를 탐색하던 작가는 전쟁으로 터전을 잃은 사람이나 삶을 잃은 전사자를 떠올리며 사인볼을 통해 귀소, 귀환을 알린다. 탑처럼 쌓아 올린 <뉴제비타운>은 우리에게 이곳을 바라봐달라는 신호이자 죽은 이의 유골이나 넋을 기리듯 현대적 영지(靈地)를 나타내는 듯하다.
강정보 디아크 언덕 위에 있는 류재하의 <250526 눈치>와 김영섭의 <꿈의 정원> 그리고 김성수의 를 보며, “신화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구조화한다.”라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서구 근대 문명에서 보았던 대규모 학살과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서구의 근대 문명의 야만성과 잔인성은 세계의 여기저기서 사회의 구조화를 통해 더욱 날카롭게 대중을 유혹하고 속박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눈치’를 본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으나 때로는 타인의 시선이나 간섭으로 버거울 때가 있다. 류재하의 작품<250526 눈치>는 시선의 긴장감을 마주하게 하는 작품이다. 디아크를 뒤로하고, 건축물과도 같이 커다란 얼굴의 두 눈동자가 오른쪽, 왼쪽을 이리저리 오가며 우리를 바라본다. 관찰자인지, 감독관인지
그 누군가인지 모를 눈동자는 크기의 중량감으로 우리를 압도하지만, 우리가 평소 마주하는 시선이 아닐까 싶다. 거울 속의 나의 시선이면서 타인의 시선으로 말이다. 우리는 감시당하고 있지만 동시에 감시하고 있다는 것,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관계에서 마주할 수 있는 우리네 풍경일 것이다.
김영섭의 <꿈의 정원>은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낸 꿈의 형태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혼-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많은 이들의 꿈은 다양했지만, 현대인의 꿈이란 사회 구조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꿈의 내용 중, ‘복권 당첨 1등’, ‘부자’, ‘건물주’ 등 사회 구조 안에서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바람은 사회 시스템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데, 서로 대립하면서 쌍을 이룬다. 여자와 남자, 성공과 실패, 부와 가난 등 이는 반대말이기도 하지만 대상이나 상황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우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란 선택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말처럼 사회관계나 사회적 행위는 우리가 사회를 보는 방식을 결정하는 개념으로 구조화되는지 모르겠다. 그런 측면에서 작가의 생각처럼 꿈은 우리에게 순수한 대상이 아닌 사회 구조가 만들어 준 허상일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페가수스와 오늘날의 경찰의 이미지를 합쳐서 을 철 조작으로 완성한 김성수는 신화를 통해 사회에서 해결되지 않는 모순을 상상적으로 드러내는 구조적 모순으로 시각화한다. 평화와 질서를 해치는 이들을 향해 휘두르는 집행자의 검무는 페가수스를 타고 신이 된다.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는 ‘그 사회가 지닌 해결되지 않는 모순을 상상적으로 해결하려는 이야기’라고 한 것처럼 김성수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내는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과연 지성의 산물인지 묻는듯하다. 권력은 타인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이다. 이것이 신격화되었을 때 대중은 무력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귀여운 얼굴을 한 은 힘의 상징이 아니라 세상의 아쉬움을 허상의 이미지로 만들어, 유머러스하게 제시하는 듯하다.
임승천의 <붉은 발> 또한 이 사회가 만들어 낸 구조적 특징을 드러내는데, 바로 현대 사회가 만들어 준 아파트라는 구조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아파트에서의 삶은 우리에게 층간소음이라는 갈등을 제공했다. 누군가의 천장이고, 누군가의 바닥 아래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은 스스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 것이다. 끝없이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는 곳은 어디인가? 하늘 높이, 천국인가? 오히려 끝을 알 수 없어 위태로워 보인다. 누군가의 어깨를 밟고 서서 수직으로 상승하는 모습이다. 달리 보면 서로서로 지탱하고 있는데, 아슬아슬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생존의 단면을 보는듯하다. 핏빛 <붉은 발>은 열정적인 삶이면서 희생이고, 생명의 존엄함이면서 처절함이다. 이양가적 의미는 살아있기에 느낄 수 있는 만족감과 두려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현대인의 초상이라 하겠다.
이어 홍준호의 <허락 없이 배포하여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III>는 귀금속처럼 빛나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조형물이다. 높이 2m, 둘레가 2.5m가 넘는 이 큰 다이아몬드는 우리에게 빛나는 보석의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법 대부 전단과 화투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다. 코로나 시기, 특히 금전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준다는 문구는 가히 유혹적일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이면에는 누군가의 어려움을 사는 행위로 자신의 배를 불리는 경우가 있다. 이윤 획득을 위한 생산 활동의 범위를 교묘히 파고들어 공동체의 터전을 병들게 하는 것이다. 상품이나 화폐 따위에 종속되어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작가는 작품을 통해 다시금 상기시킨다. 바로 뒤틀린 자본주의의 밑바닥을 아주 적나라하게 제시하면서 현혹되지 말아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길 말이다.
오늘날 개인의 노동력을 사고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갑과 을이 존재하고,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고초는 때론 쉽게 무시되어 왔다. 이러한 경험과 고민은 신민이 작가로 작업하는데 영감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노동자의 일상과 사회 구성원 사이에서의 불편한 진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작가는 관객에게 묻는다. 친절의 범위와 상대에 대한 배려가 때론 일방적이진 않은지! 항상 ‘손님은 왕’이라는 전제하에 자본이 누리는 힘은 돈을 가진 자에게 복종하게 하지는 않는지! 이러한 해석은 인간관계에서의 배려나 양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의 요구나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에서 발생한 갑과 을의 아쉬운 단면을 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마감5분전인데드시고가세요손님?>은 관객에게 이러한 상황을 한번 즈음 생각해 보길 권하고 있다.
노란색 플라스틱 바리케이트를 주요 소재로 아치 형태의 괴물과도 같은 조형물을 만든 정승 작가는 사물이 지닌 특징 너머의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제시한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노란색 바리케이트는 공사장이나 주차 금지구역 등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약속된 안전장치다. 사회 구성원 간에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하는 법의식이자 규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바리케이트는 안전이란 명분으로 곳곳에 너무나 많아졌다. 그래서 그 성격과 역할이 그 범위를 지나치게 많이 만들어 내거나 범주화하진 않는지 되묻는다. 어쩌면 바리케이트는 상징적일 수 있다.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는 끊임없는 규범과 규칙이 오히려 우리의 삶에 들어와 지나치게 우리를 억압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바리케이트를 활용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작품 <우리는 눈에 띄어야 한다: 순환>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는 자유롭고 싶은 인간의 일탈이 아주 재치 있게 재생되었다고 하겠다.
박기진의 <통로> 또한 사회의 구조 속에서 위태로운 개인의 시선을 구체화한다고 여겨진다. 비무장 지대(DMZ)에서 근무한 군시절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분단과 통일에 관한 이야기는 그의 작품을 통해 공간과 시점을 통해 구조화되기 때문이다. 통로는 보통, 사람이나 물건이 지나다니는 길이다. 작가에게 통로는 그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가 된다. 특히 이번 출품작 <통로>는 올라가고, 들어가고, 돌리고, 바라보는 행위의 과정을 통해 관객은 벙커 안을 공유할 수 있다. 이어서 시선이 머무는 곳이 통로가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듯 같지만, 벙커 안의 운전대를 돌려 동서남북 사방을 관찰하게 하는 것은 망원경과도 같은 렌즈를 통해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모두에게 다를 수 있음을 제안한다. 벙커와도 같이 강한 철 구조물은 우리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가둘 수도 있다. 우리가 그 안에서 어떻게 느끼는가는 통로를 통해 구체적일 수도 있고, 상징적이면서 추상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린다. 길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최적의 길이와 편리성을 담보한 통로가 되어 우리를 인도한다. 벙커는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작가에게 <통로>는 현대인의 삶에 투영되어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향하는 우리의 시선을 통해 구축될 수 있는 길임을 숙고하게 한다.
심승욱은 ‘존재와 부재’, ‘구상과 추상’ 같은 양극의 특징을 동시에 드러내는 형태의 작품을 선보인다. 출품작 <승리의 여신>은 그리스 신화에서 승리를 상징하는 ‘사모트라케의 니케’의 형상을 조형적으로 해체된다. 어찌 보면 부서진 형태의 조각이라 하겠다. 최근까지 작가의 작품은 국가 혹은 집단이 추구하는 틀 속에서 개인이나 소수의 목소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제시했다. 대상을 파편화하거나 인물의 형태를 단순화시켜 사회의 구조 안에서 개인이나 소수가 어떻게 붕괴하였는지 몇 가지 사회적 사건을 통해 선보여 왔다. <승리의 여신>은 전쟁에서의 승리이자 승리의 상징으로 한 국가의 지나친 바람을 담고 있다. 그리고 승리의 이면에는 파괴와 패배가 존재한다. 승리라는 아름다움을 가장한 부분과 파괴의 흔적을 동시에 담은 작품 <승리의 여신>은 오늘날 국제사회의 배타주의와 이기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듯 파편화된 조각은 허상의 이미지를 닮아 있지만, 21세기의 현대조각의 특징이기도 하다.
서동신은 순간을 기록하는 사진의 특징에서 벗어나 대상이나 장소의 이미지를 합성해 추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사진작가이다. 여러 장의 사진을 겹쳐 새로운 화면과 색채로 구성된 추상 사진은 사진 이상의 다른 매력을 뿜어낸다. 사진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서 사진의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자 한 작가의 실험정신을 참고할 기회일 것이다. 사진이란 매체가 야외에서 소개되기 쉽지 않지만, 이러한 시도는 조각이나 설치 작품들과 어우러져 미적 가치를 극대화한다. 이성과 감성,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어 사진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없는 시민들에게 사진의 조형적 역할과 예술적 표현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정득용의 작품 <돗가비 지우기>는 어릴 적 전해 들었던 도깨비에 관한 기억과 상상력을 발휘해 도깨비의 상을 만들고, 이를 지우는 과정을 통해 현존의 의미를 묻는다. 현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주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과정이나 결과물을 도출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살아있음’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상을 꿈꾸고 이야기하고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지점을 공유했을 때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작가에게 돗가비는 무의식적 동경의 세계였다. 요술을 부려 인간을 돕는 마법 같은 세상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과정은 혼자 경험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와 더불어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조각해온 주변인들은 그에게 자신을 있게 한 중요한 인물들이다. 이들의 얼굴을 만들고, 자르고, 지우는 과정은 조각을 탐닉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경험이지만, 한편으론 자신을 비우는 과정이라고도 보인다. 자신을 삭제해 가는 행위는 작가의 말처럼 자아를 강하게 느끼는 집착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픈 작가적 수행(修行)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강정보 디아크 광장에 설치된 정재범의 우물의 형태를 담은 작품<움물>은 사회 공동체, 생명, 질서 등의 상징적 의미가 있다. 각박한 세상인심에 날이 갈수록 서로 마주하고 이야기 나눌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작가는 버려진 침목을 우물정(井) 자 형태로 쌓아 올리고, 침목 위에 불교 경전의 문장을 적어 넣었다. “모든 생명이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이 세상 전체에 대하여, 위와 아래, 옆을 가리지 말고, 증오와 적의 없는 마음으로.” 이 같은 문구는 평소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다시금 인지하고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고 믿는다.
장소는 기억을 불러온다’고 말하는 홍범 작가에게 어느 순간 기억을 간직하고픈 작가는 장소이자 공간을 구조화한다. 내가 살았던 동네, 부모님과 함께한 집, 아이들과 함께한 주변 풍경,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기억을 가둔다. 과거와 새로운 기억은 때론 새로운 공간에서 만난다. 한 공간에서 다음 공간으로 연결되고, 닫힌 듯 열려있고, 유한한 듯 무한한 시공간은 작가에게 스스로 움직이고 싶다고 한다. 관찰이 아닌 기억과 망각이 혼재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공간으로 말이다. 그의 공간은 움직인다. 집과 숲, 꽃과 나무, 창과 문이 하나로 합쳐져서 기둥이 되고, 우리에게 왔다가 돌아간다. 출품작 <기억의 광장>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의 사적 공간은 구조화되어 겹침과 울림을 반복하며 관객과 함께하면서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이렇게 더해진 기억은 작가에게 추가된 공간으로 다시 돌아오고자 한다.
스튜디오1750은 주어진 공간이나 환경에 맞는 작업을 한다. <물, 빛, 그리고>는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 강 문화관 디아크 광장에서 선보이는 야외 설치미술 작품이다. 과거 프랑스 실내 식물원의 기억을 모티브로 거닐고, 탐색하고 체험하는 과정을 작품에 담았다. 김영현과 손진희, 두 작가는 한 팀을 이뤄 그들이 경험한 세상을 추상적이면서 유희적으로 예술적 공간을 연출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밤의 아름다움, 식물원이 준 재생의 기운, 빛이 통과하는 색채의 아름다움 등을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도록 공간을 가꾼다. 공간은 내게 주어지지만, 함께 만들어 나갈 때 빛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연꽃부터 열매, 잎, 뿌리에 이르기까지 식용 및 약재로 이용되는 연꽃은 청정함, 고귀함, 순결, 다산 등을 상징하며, 특히 불교에서는 번뇌 속에서도 깨끗함을 유지하는 성스러움과 깨달음을 나타낸다. 더러운 진흙에서 피어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특성 때문에, 혼탁한 세상 속에서 순수함과 긍정적인 가치를 지키라는 의미도 담고 있기도 하다. 왕지원의 작품 <모호한 경계>는 잔디 위로 연꽃이 잔뜩 피어 있고, 그 중심에 어여쁜 소녀의 얼굴이 꽃을 피우듯 수면과도 같은 잔디 위로 올라온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우리에게 안락함과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다. 이러한 기계문명 속에서 인간은 영생하듯 영원할 수 있는지, 작가는 그 바람이 실현 가능한지 의문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다. 순수함을 간직하고픈 작가의 마음과 바람이 세상의 난제 속에서도 작품이 어여쁘고 의미 있게 표현되길 바라는 듯하다.
야외 설치미술 전시는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접할 수 있다. 그래서 조심스러웠다. 관객에게 좀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지나치게 난해하거나 그렇다고 쉽지도 않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기를 원했다. 작품 하나하나 가지고 있는 특징과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전시를 보고 시간이 흘러도 그 누군가는 기억해 주길 희망한다. 그 기억이 의미 있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번 2025 달성 대구현대미술제 《난장난장난장》이 대구시민들에게 좋은 기억이 되었기를 바란다.